유럽을 차례대로 방문하고 돌아온 소년들은 활판인쇄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넓리 포교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리서 도치리나키리시탄(どちりなきりしたん) 산토스의 작업(サントスの御作業:1591년 가즈사(加津佐)에서 간행한 기리스탄의 책. 유럽에서 전해져 들어온 성인(聖人)들을 발췌한 것으로 예수의 12제자를 비롯하여 성인(聖人), 순교자들의 전기를 번역한 것이다)등이 미나미 시마바라(南島原)시 가즈사(加津佐)에서 인쇄되어 포교활동에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포교활동에 그림과 음악을 사용하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서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선교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동판화 세리비아의 성모가 남겨져 있다. 섬세한 선화는 일본인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이러한 고도의 예술성은 기리스탄의 초등교육기관인 세미나리요등에서 육성되었다. 아리마(有馬) 지역(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市))에도 교육기관이 있었고, 동판화뿐만 아니라 유화와 수채화등은 로마에서 제작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미술교육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선교사 프로이스도 칭찬했다고 한다.

금교령 중에 귀국한 4명의 소년들은 인도 부왕(インド副王:이 친서가 건내진 때는 14대 마티아스 데 알부케루케로 전해지는데 실은 인도 지역은 식민지로 [포르투칼영토 인도]가 존재했다. 인도 서해안의 격리된 땅으로 고아,다만,디우,본베등이 포함됨)의 사절단으로서 당시 위정자인 도요토미 시데요시(豊臣秀吉) 앞에서 서양 악기를 연주하고 흥을 돋구며 기쁨을 선사했다고 한다. 서양에서 가져온 문화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