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らしょ こころ旅

오라쇼 이야기 (1)

기독교 전래와 번영의 시대

15世紀半ば、世界進出に乗り出したポルトガルは、その後、東南アジアに到達した。1550年、平戸(ひらど)に最初のポルトガル船が来航したのを機にポルトガルとの貿易が始まり、貿易船に便乗して来日したイエズス会の宣教師たちによってキリスト教は平戸、長崎(ながさき)、有馬(ありま)を中心として全国的に広まっていった。
戦乱のなか日本を統一した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は1587年に「伴天連(バテレン)追放令」を発令。貿易目当てからいったんは黙視されたが、1614年に江戸幕府が禁教令を発令した。多くの宣教師は国外に追放され、すべての教会が破壊された。
1637年、領主の苛政(かせい)などをきっかけに「島原・天草一揆(しまばら・あまくさいっき)」が勃発(ぼっぱつ)。この戦いで2万数千人の一揆勢がほぼ全滅したが、これをキリシタン一揆ととらえた幕府はついにポルトガルと断交し海禁を行った。
厳しい禁教のなか、日本に密入国した10人の宣教師が捕らわれ、1644年には最後の宣教師小西マンショが殉教。宣教師と日本人との交流による宣教は途絶えたが、潜伏キリシタンのひそかな信仰によってヨーロッパとの交流の明かりは消えることなくともり続けたのである。
(挿画:庄司好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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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1543 ポルトガルより鉄砲伝来。東西文化の交流が始まる
1549 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鹿児島に上陸
1550 平戸に最初のポルトガル船来航(南蛮貿易始まる)。長崎地方にキリスト教伝来
1563 大村純忠が横瀬浦で洗礼を受ける
1571 長崎開港
1579 ヴァリニャーノ来日
1580 長崎、イエズス会領となる
1580 有馬晴信が日野江城にて洗礼を受ける
1580 有馬にセミナリヨ開設
1582 天正遣欧使節、長崎出発
1584 天正遣欧使節、スペイン国王謁見
1584 有馬晴信、浦上村をイエズス会に寄進
1585 天正遣欧使節、ローマ教皇謁見
1587 伴天連追放令発布
1597 フランシスコ修道会6名含む信徒26名を処刑
1603 江戸幕府開かれる
1614 江戸幕府、キリスト教禁教令発布
1637 島原・天草一揆勃発
1644 最後の宣教師が殉教。日本国内に神父不在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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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キリスト教を通じた日本とヨーロッパの交流の始まり

    15世紀中頃、世界に勢力を拡大し始めたポルトガルは、15世紀末には新たな貿易の拠点を求めてアジアに進出、16世紀中頃には東南アジアに到達した。
    1540年にローマ教皇パウロ3世により修道会として認められたイエズス会は、ポルトガル国王の要請を受けて宣教師をインドに派遣、ゴアを拠点に布教活動を開始した。そんななか、イエズス会の宣教師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は、当時、ポルトガルの貿易拠点であったマラッカでひとりの日本人と出会い、その情報をもとに日本での布教を決意。1549年、鹿児島(かごしま)に上陸した。このことがキリスト教を通じた日本とヨーロッパの交流の始まりだったのである。
    (挿画:庄司好孝)

  • 平戸、長崎、有馬などを中心に広まったキリスト教

    その後、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は、上陸した鹿児島から京(きょう)までの道のりの途中で長崎(ながさき)県の平戸(ひらど)や山口(やまぐち)で布教を行い、多くの信徒を獲得。その後、宣教師が次々と日本を訪れ、キリスト教を広めていった。
    1550年、ポルトガル船の平戸への来航をきっかけに、日本とポルトガルとの貿易(南蛮貿易)がスタートした。東アジアの玄関口だった長崎地方には貿易のために数多くのポルトガル船が入港し、それに便乗したイエズス会の宣教師たちが次々に来日。貿易港となった平戸、長崎、有馬(ありま)などを中心にキリスト教は広まっていった。
    人々は、東洋とは異なる西洋文化に興味を抱き始め、教理を学ぶうちに次第にキリスト教への信仰に理解を深めていった。
    (挿画:庄司好孝)

  • キリスト教宣教の拠点として栄えた有馬

    貿易の利益を求めて宣教師を受け入れた九州地方の大名の中にはキリスト教に改宗し、深く信仰する人たちもがあらわれてきた。彼らは「キリシタン大名」と呼ばれ、キリスト教を保護し宣教師たちの布教活動を支援した。九州地方のキリシタン大名としては大村純忠(おおむらすみただ)、有馬晴信(ありまはるのぶ)、大友宗麟(おおともそうりん)、小西行長(こにしゆきなが)らがよく知られている。
    長崎地方の大名であった有馬晴信は、1579年に来日したイエズス会巡察師のアレッサンドロ・ヴァリニャーノと出会い、有馬氏の居城である日野江城(ひのえじょう)で洗礼を受けた。晴信は、「伴天連(バテレン)追放令」が出たあとも積極的に宣教師を受け入れたため、有馬はキリスト教宣教の拠点として栄えた。
    キリシタン大名の領地では領主にならって多くの領民が改宗し、洗礼を受けたことから長崎地方には多くの教会堂が誕生した。そして有馬や長崎、浦上(うらかみ)、天草(あまくさ)にはセミナリオやコレジオがおかれ、洋風画や西洋音楽、印刷技術などのヨーロッパ文化が広まっていった。
    (挿画:庄司好孝)

  • ローマ教皇に謁見した4人の天正遣欧使節

    1582年、有馬のセミナリオで学んでいた4人の少年たちはヴァリニャーノの発案により天正遣欧使節として長崎を出発。マカオ、ゴア、喜望峰(きぼうほう)をまわってリスボンに到着し、スペイン国王やローマ教皇に謁見した。
    1571年以降、ポルトガル船の入港をきっかけに貿易の拠点となった長崎には、多くのヨーロッパの商人や宣教師たちが滞在した。長崎の町は1580年から7年間、イエズス会領となり、長崎の町の中心に10を超える教会堂が建設され、ヨーロッパの外科学(南蛮医学)も伝えられた。
    (挿画:庄司好孝)

  • 新たな信仰を広めるための方法と組織づくり

    宣教師たちは信徒を獲得するため、まず領主に教えを説いて改宗させたのち、彼らを介してその家臣、全領民を集団改宗させるという方法をとった。領主が改宗に応じない場合は、ヨーロッパの品々などを贈ることによって領内での宣教の許可を得ようとした。また、主に九州や山口、畿内地方で布教していた宣教師たちは、村や町の有力者を中心に数名の信仰指導者を選び、自分たちの力で信仰を続けていくことが可能な組織をつくった。この組織は「慈悲の組」と呼ばれ、1587年の「伴天連追放令」が発令されたあとも存続し、さらに信仰の維持、強化のためにコンフラリア(信心会)が有馬、大村(おおむら)、天草につくられた。
    ヴァリニャーノは、このような積極的な活動の成果をふまえ、日本イエズス会をゴアの布教区から独立させて準管区とし、「下(Ximo、現在の有馬、長崎)」「豊後(Bungo、現在の府内、大分)」「都(Miaco、現在の京都)の三教区制とした。この通信制度によって公式の年度報告がローマのイエズス会本部に毎年送られ、日本の政治、社会、キリスト教界の進展状況がくわしく伝えられたという。
    (挿画:庄司好孝)

  • 禁教令の発令と島原・天草一揆の勃発

    戦乱が続くなか、日本を統一した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は、1587年に「伴天連追放令」を発布してキリスト教の信仰を禁止し、大村氏がイエズス会に寄進した長崎を没収して直轄地とした。そして1596年、フランシスコ会修道士6人を含む信者26人を長崎の西坂(にしざか)で処刑した(日本二十六聖人の殉教)。しかし、貿易を継続したいという想いから禁教は徹底されることなく、その後もキリスト教の布教は続いたのである。
    秀吉の死後、江戸幕府を開いた徳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も当初は貿易を継続するためにキリスト教を容認したことから信徒が増加。最盛期にはその数30万人を超えたという。
    1614年、江戸幕府は封建体制を確立するため、キリスト教の禁教令を発令した。宣教師はマカオやマニラへ追放、教会は破壊され、厳しい弾圧によって多くの信徒が棄教した。しかし、宣教師が去った後も密かに信仰を守った人々もいた。
    そんななか、領主の苛政(かせい)と飢きんをきっかけに、1637年、有馬、天草の人々によって「島原・天草一揆(しまばら・あまくさいっき)」が勃発(ぼっぱつ)。原城(はらじょう)は一揆の最後の戦場となり、幕府軍の攻撃によって一揆軍2万数千人がほぼ全滅した。幕府により徹底的に破壊された原城跡からは、一揆勢のキリシタンたちが所持していたメダイや十字架などが数多く出土している。この蜂起(ほうき)を当初からキリシタン一揆と位置づけていた幕府は、その後弾圧をいっそう強化。日本におけるキリスト教はさらに厳しい時代を迎え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挿画:庄司好孝)

  • 仏教への改宗を強要されても守り通した信仰

    島原・天草一揆で大きな痛手を受けた幕府は、1639年にポルトガル船の来航を禁止し、厳しい海禁政策に乗りだした。ポルトガル人に代わって日本の貿易相手となったのはカトリックと対立していたプロテスタントのオランダ人。やがて平戸にあったオランダ商館は長崎の出島(でじま)に移された。
    禁教が続く1617年から1644年までに処刑された宣教師は75人、殉教したキリシタンも1000人以上にのぼった。弾圧は一段と厳しくなり、幕府は聖画像やメダイなどの信心具を踏ませて(絵踏)、キリシタンの摘発に努める一方、仏教へ改宗させて宗門改帳(しゅうもんあらあためちょう)に記載するなど寺院の管理下に置いたが、彼らはひそかにキリスト教の信仰を守り通したのである。
    厳しい禁教下、1642年、43年には日本に密入国した10人の宣教師が捕らわれ、1644年には最後の宣教師小西マンショが殉教した。ザビエルに始まった宣教師と日本人の交流によるキリスト教宣教は途絶えたが、潜伏キリシタンのひそかな信仰の継承によって、ヨーロッパとの交流の明かりは消えることなくともり続けたのである。
    (挿画:庄司好孝)

관련 인명・용어(마우스를 갖다 대면 읽기 및 설명이 표시됩니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히젠 아리마의 영주. 1571년에 가독(家督)을 상속하고 히노에성에 거주. 1580년에 발리냐노에게 세례를 받고 기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 1582년에는 사촌인 지지와 미겔을 덴쇼켄오 사절로서 로마에 파견했다.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령했을 때에는 영내에서 선교사를 보호했다.

예수회

[예수회] 로마 교황의 공인을 받은 가톨릭의 수도회.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등에 의해 1534년에 결성되었다.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예수회 순찰사로서 초기 일본의 그리스도교계를 지도한 사제. 1579년부터 세 차례 방일하였으며 1590년에 인도 부왕사로서 2번째 방일했을 때는 귀국한 덴쇼켄오 사절을 동반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일본 선교 시에 일본의 풍습에 순응할 것, 세미나리오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설치할 것 등의 혁신적인 방침을 제시했다.

에부미

[에부미] 금교 시대에 성화상이나 메다이, 십자가 등을 발로 밟게 하여 기리시탄을 찾아 내고,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밟힌 그림이나 조각상을 '후미에'라고 한다.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분고(현 오이타현)의 영주. 1551년에 방일 중인 사비에르와 만나 이후 기리시탄을 보호했다. 1559년에 규슈단다이(探題)가 된다. 1578년에 세례를 받아 기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히젠 오무라의 영주. 1550년에 아리마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가독(家督)을 상속. 1561년에 영내의 요코세우라 항구를 포르투갈 선박에 개항하여 스스로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카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았다. 우키타 가문을 섬긴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이 되어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장악했으며 가장 유력한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조선 출병 시에는 제일선에서 활동했고, 귀국 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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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지요(콜레지오)] 예수회 순찰사인 발리냐노가 설립한 성직자 양성 학교. 신학, 종교학, 철학, 자연과학, 라틴어 등 고등 교육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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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프라리아] 그리스도교가 금지되기 전부터 신자들이 지역별로 만들던 집단(구)으로, 신앙을 강화하면서 봉사 활동에 힘썼다. 잠복기의 기리시탄의 지하 조직은 이 집단(구)이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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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 예수회의 창설자 중 한 명으로, 1549년에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일본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이듬해에 나가사키현 히라도로 내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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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조]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구제를 위해 봉사한 신념회 '미제리코르디아'를 뜻하는 말로, 본부는 나가사키에 있다. 일본에서는 '자비의 조', '자비옥' 등으로 불렸다. 일본 복지 사업의 선구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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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하라 아마쿠사 봉기] 1637년부터 1638년에 걸쳐 시마바라 반도 남부와 아마쿠사 제도의 농민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봉기.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2만 수천 명이 참가하여 하라성에서 농성을 펼쳤으나, 막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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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신에게 평생을 바친다는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 남자 수도회, 여자 수도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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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도덕을 버리기보다 죽음을 택하여 신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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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켄오 사절] 이탈리아인인 발리냐노 신부가 만든 아리마 세미나리오에서 공부한 4명의 소년(이토 만쇼, 지지와 미겔, 나카우라 줄리앙, 하라 마르티노)를 기리시탄 다이묘인 오무라 스미타다,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의 대리인으로서 유럽에 파견. 로마 교황을 알현하는 등 큰 환영을 받았으며 서양 음악과 인쇄 기술 등을 배워 1590년에 귀국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이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사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권을 쥐고 장군이 된다. 처음에는 기리시탄에게 관대했지만, 기리시탄이 관련된 봉건제를 뒤흔드는 사건(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1612년 이후 금교 정책을 펼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오와리 출신.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 후계자가 되어 일본 내 통일 정권을 수립했다. 1587년에 '바테렌 추방령'을 공표했지만, 남만무역(南蠻貿易)은 허용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정책이 되었다. 1597년에 프란시스코회 수도사 6명과 일본인 기리시탄 20명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서 처형했다. (일본 26성인 순교)

일본 26성인 순교

[일본 26성인 순교] 당시 권력자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이유로 처형된, 일본 최초의 순교 사건. 교토, 오사카 등에서 체포된 26명의 신자가 걸어서 나가사키까지 온 후 1597년 2월 5일에 니시자카에서 처형되었다.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26명은 성인이 되었다.

바테렌

[바테렌] 그리스도교가 전해졌을 시기의 사제(신부) 또는 선교사를 포함한 성직자들. 포르투갈어의 파드레에서 나온 말.

프란시스코회

[프란시스코회] 로마 교황의 공인을 받은 가톨릭교의 수도회. 13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아시아의 프란시스코와 11명의 동지에 의해 설립되었다.

메다이

[메다이] 신자가 마리아 님과 성인들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지니는 메달과 같은 모양을 한 물건

인명・용어 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