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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4月にオープンした春日集落の案内拠点施設では、歴史を受け継ぐ「語り部」たちと交流できる
日本初のキリシタン大名として知られる大村純忠。戦に明け暮れる中で、キリスト教に心動かされていった!?
グーテンベルク印刷機を使って印刷された「天草本(ルビ:あまくさぼん)」。ローマ字書きの「伊曽保物語(イソップ物語)」なども出版された
﨑津集落や今富集落を歩いていて気づくのが、玄関に飾られているしめ縄。一年中外さないのはなぜ?
﨑津集落の風景や文化を語るとき、必ず登場する「カケ」と「トウヤ」って、何のこと?
1600年頃に天草の教会で使われていたのは、竹筒を使ったパイプオルガン
とても心地よい音色だったという
今から400年以上も前に横瀬浦で歌われていたラテン語聖歌が、西海市の小学生の歌声で甦った
田平にできるだけ大きな教会堂を建てたかった中田神父と鉄川与助は、切り出した木材の長さに納得しなかった
教会堂の多くが、自動機械によって鐘の音を鳴らす中、田平天主堂は今も信徒による人力で鳴らしている
田平天主堂の敷地内にある貝殻の焼き場跡
しかし、よく見ると貝を焼いた跡が無いことに気づく
2018年、創建から100周年を迎えた田平天主堂。それを機に、創建当時のステンドグラスを案内所に展示。
島原・天草一揆で原城に立て籠もった一揆軍が幕府側に放った矢文が現存
一揆に至った心情などが綴られている
1613年、棄教を迫られた口之津の42名のキリシタンが残した連判状が、ヴァチカン図書館に保管されている
禁教制度が解除され、宣教活動が本格化すると、海に面した地域の宣教師は小さな船で教会を巡回した
計画から4年の歳月を費やして建設された田平天主堂
資材を信徒が担いで登った道は、とても険しかった
黒島天主堂の祭壇に敷かれている美しい有田焼のタイル
なんと、五島列島のとある場所でも使用されていた!?
春日集落のかくれキリシタン講で継承されていた「お札」の行事。当たり札は「おふくろ様」!?
16世紀末に有馬セミナリヨの画学生によって描かれたとされる銅版画「セビリアの聖母」復刻までのドラマ
ド・ロさま畑で採れた野菜やお茶を味わえる「ヴォスロール」。ド・ロさま小麦で作るパンも美味しい!
多くの人が見学に訪れる日本二十六聖人殉教記念碑。実は碑の裏側にもこんな作品が!
禁教期、3つの組に分かれて信仰を守り通した﨑津集落。その時代の資料は﨑津資料館「みなと屋」で見ることができる
信徒発見や放虎原殉教記念碑など、数々の大作を残す中田秀和氏は五島生まれのカトリック
外海の潜伏キリシタンが大切にしたというバスチャンの日繰り。一体、何が書かれているのか?
明治初期、カトリックに復帰したばかりの信徒のために暦を印刷したのは、のちに外海に赴任したド・ロ神父だった
17世紀に日本人絵師によって描かれた聖画「雪のサンタマリア」。映画「沈黙〜サイレンス〜」にも登場
数奇な運命をたどったジュリアンの最期は、拷問の中でも最も苦しいとされる穴吊りの刑であった
大浦天主堂の建設に関わった伊王島の大工・大渡伊勢吉は、伊王島のキリシタンのために2つの教会を造った
天正遣欧少年使節の4人のうち、ただ1人棄教した千々石ミゲルの墓が発見された!?
仏教の教えにならう三界萬霊塔が、潜伏キリシタンゆかりの集落にも多く立てられているのは何故?
天草の今富集落では明治になってからもカトリックに復帰せず、先祖から伝わる儀式を行った
天正遣欧少年使節に随行したメンバーの中にドラードという15歳の混血児がいた。彼の使命は・・・
天正遣欧少年使節としてローマに渡り、大歓迎を受けて帰ってきた4人を待ち受けていたのは辛い現実であった
一時は耕作放棄地となっていた「ド・ロさま畑」。今は息を吹き返し、賑やかな交流の場となっている
外海の潜伏キリシタンが、神様に見立てて拝んだ像は「イナッショ様」というユニークな名前で呼ばれた
ヨハネ五島は神父の身代わりとなって殉教
その遺骨は奇跡の再会後、五島に里帰りした
旧五輪教会堂にはステンドグラスはない
ガラスとガラスの間にセロハンをはさんだ信徒たちの思い
樹齢250年以上といわれる巨大サザンカは
西彼半島からの移住者が持ち込んだもの
旧五輪教会堂の正面脇につながる九州自然歩道は
かつて信徒たちが利用していた里道
匿名の信者から贈られた大浦天主堂の鐘は
約1m四方のフランス製
キリシタンの復活期をたどる古い御水帳。大曾教会の一番古い御水帳は、外海で見ることができる。
現在の煉瓦造りの大曾教会堂は二代目
初代の教会堂も生き続けている
黒島は天国のほうが人口密度が高い!?
十字架が密集するカトリック共同墓地
昭和初期の堂崎天主堂の公式初聖体式が
報道写真家によって写真におさめられていた
列福運動も起こっている五島出身の中村長八神父
ブラジルでは「生ける聖人」と呼ばれた移民者の恩人
キリシタンの姫が嫁いだ先は
キリスト教嫌いの松浦家。そのとき夫は・・・
シスターが鳴らす黒島天主堂の鐘
透き通ったその音色の秘密とは・・・
五島市奥浦地区は、貧しい子を救済した子部屋と、
その事業母体となった女部屋発祥の地でもある。
椛島の潜伏キリシタンは誰一人カトリックに復帰せず、
禁教時代の信仰を守り続けた
歌手の五輪真弓さんのルーツは久賀島五輪地区
おじいさんは教会でオルガンを弾いていた
大きくて堅い豆腐や素朴なまんじゅうは、
カトリック集落に伝わる昔ながらの味
アルメイダの布教によりキリスト教が栄えた五島
しかし、その後は厳しい弾圧が行われた
創建当時、大浦天主堂正面にあったバラ窓を
意外なところで発見!
煉瓦造りのりっぱな青砂ヶ浦天主堂
その建設に伴った信徒たちの苦労とは!?
外海赴任から35年、外海のためにすべてを捧げたド・ロ神父は、自らが造成した野道共同墓地に眠っている。
山林に囲まれた大きな岩。それは、年に一度だけ、見張りを立てて、オラショを声に出して唱えた場所だった。
終戦から4ヶ月後のクリスマス、戦後初めての鐘が浦上一帯に鳴り響き、信徒たちを勇気づけた。
受難に耐えた浦上信徒の歴史を物語る場所に再建された新聖堂は、ローマ教皇の来日を前に今の姿になった。
浦上のキリシタンたちは、絵踏みを行った罪を償うために、あえて庄屋屋敷跡に教会を建てた。
旧天主堂に飾られていた高さ2mのマリア像は原爆により破壊され、焼け跡から頭の部分だけが見つかった。
小学校の建替え工事で発見された教会の地下遺構。
ライトアップされた遺構の中に地下室や排水溝、石畳など教会の跡が確認できる。
伊王島にある馬込教会の中央祭壇上には、三大天使の一人、聖ミカエルの像が掲げられている。
教会や救助院をつくったド・ロ神父は、農業にも力を注ぎ、女性たちに土づくりから指導した。
キリシタンを祀る神社は日本でも珍しい。
枯松神社では年に一度、キリスト教と仏教、かくれキリシタンが、共に祈りを捧げる。
椿が長崎や五島のキリシタンゆかりの木として大切にされる所以は、バスチャンの伝説にあった。
キリシタンたちはバスチャンが残した4つの予言を信じて、250年もの間、親から子へと信仰を継承していった。
禁教期に外海地方で伝道した金鍔次兵衛神父は、あるときは武士に変装し、金鍔の刀を差していた。
出島に収容されたオランダ人が催した年に一度の大宴会「阿蘭陀冬至」は、実はクリスマスのお祝だった。
墓石の取調べは厳しく、疑わしいものはすべて破壊された。
以降、自然石を置いただけの文字も模様もない墓に葬った。
トードス・オス・サントス教会は、長崎で初めて建った教会である。
当時使われた井戸には、今も水が湧き出ている。
天草四郎が率いた一揆軍の象徴ともいえる陣中旗。
血痕や刀、槍の跡に戦いの歴史が垣間見える。
「五足の靴」の旅の目的は、キリシタンゆかりの地・天草で親しまれているガルニエ神父をたずねることだった。
天草の信徒のためにすべてを捧げたガルニエ神父は、天草弁で気さくに話しかける人間味あふれる神父だった。
大江教会の装飾品には作った人のぬくもりが感じられる。祭壇に飾られた聖画もそのひとつだ。
江戸時代、壱岐から移住した小田家は鯨組を組織し、大いに栄えた。
その屋敷は現在資料館となっている。
今もなお大切に残る根獅子のかくれキリシタンスポットをガイドが解説。
多くの儀式、多くの習わし。
家族の協力なくしては続けられない信仰。
信頼していたのにだまされた…。
潜伏時代に起こった悲しい物語。
変わっていった信仰ではなく、
布教当時のあり方をそのまま継承したのが本当の姿。
貿易と布教がセットに。
それがキリスト教信徒が増えた理由
信徒として洗礼を受けていた平戸の当主が、
領土の信徒を徹底的に弾圧した。
파묻혀 버린 이마도미(今富)의 역사를 앞으로도 계속 조사하고 싶다.
우연히 발견한 작은 사당에서 인자한 석상을 만나다.
이마도미(今富) 냇가의 물냉이는 깨소금을 넣고 무친 나물도 텐푸라(튀김)도 맛있어요!
연말행사「사와기(幸木)」는 아마쿠사에서 행해져 온 정월 장식. 이마도미(今富) 사와기(幸木)는 잠복 기리시탄들의 신앙을 전하고 있다.
성당는 신도들의 마음을 지탱하여 주고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장소.
아이들이 살기 위해서 밭을 일구고 기도를 드린 장소.
이국적 풍경을 조망하면서 사키쓰(﨑津) 취락을 천천히 걸어본다.
「잠복」에서「부활」까지、사키쓰(崎津) 취락에 신앙의 역사를 들려주는 귀중한 자료관.
하루프 신부님의 절실한 바람에 의해 실현된 새로운 사키쓰 성당(﨑津教会堂) 건축.
2014년 여름에 헌당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소(大曾) 성당. 각별한 마음으로 되돌아 보는 성당의 역사.
많은 성당 건축을 착수한 데쓰카와 요스케(鉄川与助)는 많은 문제를 극복하며 새로운 성당 만들기에 도전했다.
성당의 종은 오늘도 시각을 알리며 기도의 시간을 알린다.
유리 색깔이 빛치는 것과 빛치지 않는 것.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빛의 마술.
산쪽의 바위를 깎고 반대쪽을 성토(盛土)해서 토지를 확보. 항구를 내려다 보는 장소에 위치한 아름다운 벽돌 구조이다.
불교 신자에서 기독교 신자로. 사랑을 관철하여 함께 기도를 드리는 가족이 있다.
태양의 움직임을 고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배치. 빛의 연출에 감동!
가시라가시마(頭ヶ島) 부근의 고토석(五島石)을 사용하였고, 벽돌과 목재는 바다를 건너 운반하여 만든 비원의 아오사가우라(青砂ヶ浦) 성당.
다이노우라(鯛ノ浦)의 기리시탄들에게 이주를 유도하고 가시라가시마(頭ヶ島) 취락을 만든 마에다 기다유(前田儀太夫)라는 사람은.
사랑을 담아 재배하는 꽃들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행복. 가시라가시마(頭ヶ島)성당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여기에 있다.
외관과 내관 예배당의 차이에 압도당하는 가시라가시마(頭ヶ島) 성당. 그곳은 많은 꽃들로 둘러쌓인 기도의 장소.
오랜 세월을 걸쳐 고장의 돌을 잘라내어 석공과 함께 신자들이 쌓아 올렸다.
채석업을 생업으로 해 왔던 돌문화를 지닌 사키우라(崎浦)지역. 가시라가시마(頭ヶ島)성당을 만든 양질의 돌은 돌 다타미(畳:돗자리)와 돌담등에 사용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8) 노자키(野崎)섬에 많은 기리시탄들이 희망을 품고 이주해 왔다. 지금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오지카(小値賀)로 이주하여 섬의 활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오지카(小値賀) 제도(諸島)의 문화적 경관」은 국립 선정 중요 문화적 경관이다.
「옛날 그대로」의 경관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따뜻함과 인정속에 녹아 들어 있다.
후나모리(舟森) 마을 사람들은 노쿠비(野首) 마을 사람들보다 5년 더 빠른 1966년에 섬 밖으로 집단이주를 시작했다. 오지카(小値賀) 섬에 사는 유일한 호나모리(舟森) 출신자인 신자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누쿠비(野首)와 후나모리(舟森)의 두 기리시탄 마을을 잇는 약 2.8킬로미터의 험한 시골길은 100년에 걸쳐 신자들이 밟아 다진 기도의 길이다.
오지카(小値賀) 섬에서 민박을 운영하는 다구치 도미사부로(田口富三郎)씨의 선조는 후나모리(舟森)에 처음으로 이주한 가족을 도와 주었다고 한다.
고생하여 노자키(野崎) 섬에 벽돌 성당을 세웠던 신자들이지만 이후 섬은 과소화가 진행된다. 1971년 섬밖으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져 노쿠비(野首)성당도 폐쇄되었다.
노쿠비(野首) 사람들은 소토메(外海)에서 고토(五島)로 이주한 기리시탄들이 시조로 후나모리(舟森) 사람들은 소토메(外海)의 마키노(牧野)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 뿌리를 찾는다.
무인도의 고지대에 세운 성당. 데츠카와 요스케(鉄川与助)가 처음으로 작업했다고 하는 벽돌 건물 성당은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아름다운 장식이 새겨져 있다.
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市)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기리시탄 묘비가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신을 이 매장방법에서 엿볼 수 있다.
미나미 시마바라(南島原)시에 있는 반원 기둥 형태의 기리시탄 묘비. 비문(碑文)이 로마자로 새겨져 서기와 원호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시마바라(島原) 아마쿠사(天草) 신자들의 봉기후, 아리마(有馬) 지역에는 집단 이주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착했다. 지금 종교나 근원을 넘어서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막부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하라 성(原城).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하라 성(原城) 토마토는 황무지가 된 땅에서 부활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본인 스스로 귀한 희생이 될 것을 받아들인 기리시탄들이 있었다. 지금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죽은 자의 부활을 두려워 하여 철저히 파괴한 하라 성(原城).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를 뛰어넘어서 죽음을 애도한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다.
하라 성터(原城跡)에서 출토된 물건중에는 기독교 관련 물건이 많다. 죽기 전에 신자 봉기군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조상 대대로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를 통치해 온 아리마(有馬) 씨가 이 지역을 떠났다. 새롭게 맞이한 영주는 일본의 운명을 좌우한다.
시마바라(島原) 아마쿠사(天草) 신자들의 봉기에는 많은 기리시탄들이 싸웠고 남녀노소2만 6천명의 목숨을 잃었다. 하라 성(原城)은 바로 그 무대가 되었다.
오다(織田)、도요토미(豊臣) 시대에 유행한 초기 석축기술을 하라 성터(原城跡)에서 볼 수 있다. 중세에서 근세까지는 성곽 건축의 과도기였다.
서로「공존」을 바랄 때, 넘어야 되는 벽이 있다. 신앙의 진리는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회는 포교를 담당할 청년들 양성에 힘을 쏟았다. 미술, 음악, 일본어와 라틴어 까지 소년들은 차례대로 이를 배워 나갔다.
교양을 두루 갖춘 일본의 소년 4명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문화 교류는 소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일본을 하나로 통솔하는 위정자들에게 아리마 씨(有馬氏)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 금박 기와(金箔瓦)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유명한 기독교 정신은 아리마(有馬) 지역에도 뿌리를 내린다.
히노에() 성터에서 출토한 동남 아시아와 중국등의 도자기 종류. 이것들은 아리마 씨(有馬氏)가 무역으로 번성했던 것을 증명해 준다.
전국시대(戦国時代:1493-1590)、영주들은 앞다투어 포르투칼 무역을 유치하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영내에 퍼졌다.
가난 때문에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소중하게 돌보았던 고토(五島)의 여성들. 그 정신이 지금도 계승되어 있다.
곶에 적벽돌로 만든 본격적인 성당이 건설되었다. 미시 시간은 소라를 불어 알렸다. 바닷가에 성당이 서 있는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소토메(外海)지방에서 바다를 건너 많은 키리시탄들이 오쿠우라(奥浦)지구로 왔다. 고토(五島)에서 키리시탄의 부활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신앙은 항상 마음 속에 있다. 어민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어 고기 잡이로 나간다. 성모님과 함께.
조상들이 염원했던 성당 건립. 그리고 신자들이 스스로 수복하면서 유지해 왔다.
테츠카와 요스케(鉄川与助)의 정열을 곳곳에 볼 수 있는 성당 건축. 제대도 그 중의 하나다.
건축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애정을 알아볼 수 있는 에가미천주당(江上天主堂). 앞으로 100년, 더 200년 남아 있기를.
과소화가 진행되는 나루섬(奈留島). 기도의 등불을 지키고 있는 신자들을 만났다.
향수(郷愁)를 불러 일으키는 배움의 집과 같은 구(旧)고린(五輪)성당에는 일본인 특유의 정교하고 섬세한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메이지 시대(1868-1912) 고토(五島)에서 탄압은 히사카(久賀) 섬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정부는 외국에서 거세게 비난을 받았고 머지않아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이 있다는 일본의 동백나무. 야생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고토(五島)에서는 옛날부터 동백 기름이 만들어져 오고 있다.
선한 일을 하면 천국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천국으로. 묘지는 천국일지 모른다.
성 요셉의 과묵함과 성실함은 한결같이 열심히 일하는 고토(五島)신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30년째 폐허가 된 예배당. 거기는 신자들의 기도하는 장소는 사라졌지만 건물이 말해 주는 메시지가 있다.
고토(五島) 열도(列島)의 히사카(久賀) 섬의 고린(五輪)지역에 세워진 구(旧)고린(五輪)성당은 원래 같은 섬의 하마와키(浜脇)지역에 있었다.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살았던 신자들. 가족 모두가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메이지(明治)시대.
스테인드글라스 문을 열면 개방적인 베란다로 나갈 수 있는 특이한 설계.
산 위로 신도들이 걸었던 길 끝에서 최고의 포상을 받는다.
주일마다 그리고 성탄절 같은 특별한 축일에도 계속 다니고 있는 천주당.
타비라(田平)천주당 근처에 있는 키리시탄 묘지.
귀천한 신자들은 거기서 조용히 잠들고 있다.
섬세한 독일제와 색채가 뛰어난 이태리제. 각각의 아름다움을 차분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싶다.
빨간 벽돌과 빨간 아마카와(석회와 적토를 섞어서 만든 접합제).
신자들은 조개 껍데기를 원료로 만든 접착제를 사용하여 일본의 그리스도교 부활을 상징하는 천주당을 완공하였다.
외국인 신부를 따라... 신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였다.
시성된 지 100년째가 되는 1962년에 순교 언덕은 26성인의 삶을 배우는 순례지가 되었다.
일본26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은 세계 각지에 있다. 일본의 역사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던 사실을 세계에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1597년에 선교사 등 26명이 나가사키(長崎)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책형으로 처형되었다. 10대 소년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가장 어린 이는 12세였다.
오노(大野)성당은 일반 민가 형태로 되어 있지만 드∙로담, 벽돌을 쌓음으로써 만든 창문, 현관 앞 바람막이 등 건축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많다.
오노(大野)성당은 드∙로신부가 세운 시츠(出津)성당의 공소이다. 현재로는 일년에 한번만 기념미사가 집행된다.
같은 소토메(外海)지구에 있는 시츠(出津)성당은 전망이 좋은 곳에 세워졌는데, 오노(大野)성당은 그와 대조적으로 후미진 곳에 서 있다.
세 가지 스테인드글라스가 혼재하는 오우라천주당. 그 스테인드글라스 하나 하나가 역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증언자이기도 하다.
‘프랑스절’이라 불렸던 오우라천주당. 성당 안에는 프랑스와 연유가 있는 선물이 많이 있다.
일본천주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프티쟝신부는 지금도 오우라천주당에서 잠들어 있다.
잠복 키리시탄들은 조상이 전해준 예언을 굳게 충실히 지켜왔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신부는 찾아왔다.
일본에서는 기리시탄은 사라지고 만 것일까? 회의적인 마음을 품고 지내던 신부들을 북돋우는 기적이 일어났다.
일본이 개항되고 나서도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 신앙. 그러한 가운데 성당 건설이 진행되었다.
나가사키(長崎)에 천주당이 건립된 것을 외국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인의 모습이 없었다.
창건 당시에는 삼랑식(三廊式)의 작은 성당. 오우라천주당은 187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오우라천주당을 건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프티쟝(Bernard Thadée Petitjean)신부는 분주하였다. 그의 편지를 통해서 그 노고를 알 수 있다.
오우라천주당은 일본26성인을 위해 건립된 성당이다. 그리고 성당 그 자체가 잠복 키리시탄을 위해 보내진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구 시츠구조원(出津救助院) 2층에 있는 오래된 오르간은 드로 신부가 프랑스에서 들여온 것. 현재 수녀님이 견학자를 위해 연주해 준다.
드로 신부는 물건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원료로 사용하는 밀과 같은 것들도 스스로 재배하였다.
소토메(外海)에 부임한 드로 신부는 주민들이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특히 여성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소토메(外海)에 부임해 온 드로 신부는 마을 사람들이 매우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고향 집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소토메(外海)를 위해 바쳤다.
소토메(外海)에는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에도 교회로 복귀하지 않고 잠복시대 이래 지켜 온 신앙을 계속해서 지키는 카쿠레 키리시탄 조직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소토메(外海) 에는 드로 신부가 스스로 보여준 사랑의 정신을 전하고자 활동하는 이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 사마(드로 님)의 집”이다.
이 땅에서 나는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드로 담은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130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무너지지 않아 그 튼튼함에 놀란다.
키리시탄 순교지이자 성지이기도 한 무인도. 신자들은 성수를 채취하기 위하여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섬으로 간다.
카미다나(神棚; 집안에 신을 모셔 놓은 감실)에 숨겨진 묵주, 할아버지가 외우는 불가사의한 기도…. 카쿠레키리시탄의 오랜 역사를 많은 분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
계단식 논 한가운데에 있는 약간 높은 산은 키리시탄 신앙이 지켜져 온 성지.
16세기 취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귀중한 지역. 전국시대 이후 변하지 않는 환경과 삶, 그리고 기도….
멀리 해상에서 볼 수 있는 산은 항로를 통해서 전래된 다양한 종교들의 거점이 되어 왔다.
구로시마(黒島) 성당의 특징인 아름다운 나뭇결 리브 볼트 천장. 실은 그 나뭇결은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 전해진다.
마르먼드 신부가 혼신을 다하여 건축한 구로시마(黒島) 성당. 그러나 거액의 공사비로 건축은 일시 중단될 위기에 놓였었다.
구로시마(黒島)에서는, 「신앙심이 깊다」를 「신코카(신앙가)」라고 한다. 신자 모두가 성모 마리아상의 그림과 로자리오, 십자가등을 매일 지니고 다닌다.
아리타야키 도자기 타일, 구로시마(黒島)산 화강암. 구로시마(黒島) 성당 건축에 사용된 소재로 주목 받음.
2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한 대규모의 구로시마(黒島) 성당. 헌당에 관여한 목수 중에 고토(五島)출신에 배를 만드는 목수 청년이 있었다.
구로시마(黒島)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드려졌을 때의 당시 시대 상황은 기독교가 금교령 정책으로 억압을 받았을 때였다. 신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변장을 하고 구로시마(黒島)를 건넜다.
구로시마(黒島)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아름다운 성당이다. 마르먼드 신부는 프랑스에서 수많은 물품을 주문했다.
에도시대(1603-1868) 구로시마(黒島)에 이주한 신자들은 새로운 신천지를 바라며 이주하였다.
일본에서는 극히 드문 설교단이다. 구로시마(黒島) 성당에 남겨진 설교단에는 마르먼드 신부님이 손수 판 장식이 남겨져 있다.
구로시마(黒島) 성당 건설을 위해 사용된 벽돌은 40만개라고 한다. 일부는 신자들이 섬에서 구워 온 벽돌도 사용되었다.